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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였을까?
꿈에서 자꾸 무협 코스프레...? 같은 복장의 사람이 보인다. 그 사람은 항상 글만 쓰고 있네... 내용을 한 번 살짝 들여다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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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살짝 들여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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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꿈에서 본 내용 미개방
꿈을 꾸었다.
지독한 피비린내와 잿더미가 휘날리던 3년 전 그날의 꿈을.
우리는 그것을 '혈겁(血劫)'이라 불렀다.
수많은 영웅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 끝에, 우리는 기어이 그 의문의 적을 무릎 꿇렸다.
헌데, 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적의 실체는 허무하리만치 작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하고 왜소한 어린아이.
저 작은 몸 어디에 세상을 멸망시킬 힘이 숨어 있었던 걸까.
저 아이가 객잔의 점소이로 있었다 한들.. 누가 의심이나 했겠는가.
역시 강호에선 노인과 아이를 조심하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모두를 장난감처럼 찢어발기던 그가, 칼끝이 목에 닿자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300년을 넘게 살았다는 괴물도 죽음 앞에서는 여전히 두려운 모양이었다.
"살려줄 수 없다면... 차라리 봉인해라."
녀석은 자신의 생명이 이미 세상 모든 무공(武功)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자신을 죽이는 순간, 세상의 모든 내공은 흩어지고 검기는 사라질 것이라고.
천마니 무신이니 하는 그 거창한 경지들이 한순간에 껍데기가 될 것이라고.
그것은 칼을 쥔 무림인들에게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협박이었다.
2/17 꿈에서 본 내용 미개방
그의 말은 공포였다. 아니, 저주였다.
놈을 살려두는 것은 훗날 10만 명을 죽일 불씨를 남겨두는 것과 같았다.
놈은 언젠가 봉인이 풀릴 것을 기대하며 혀를 놀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우리는 미래의 재앙보다 당장의 상실이 더 두려웠다.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무공을 잃고 범인(凡人)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무인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일이었으니까.
결국 우리는 놈을 죽이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 놈을 가두고, 겹겹이 봉인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허나, 그렇게 찾아온 평화는 기만이었다.
정파와 마교의 깃발이 내려간 자리에는 '계급'이라는 더 잔혹한 깃발이 꽂혔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무공의 고하(高下)가 곧 신분이 되었고, 힘은 유일한 법이자 정의가 되었다.
삼류는 일류에게, 일류는 절정에게 굴종해야 하는 숨 막히는 먹이사슬.
그 서열 놀음의 끝은, 피아(彼我) 구분조차 없는 난전(亂戰)이었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칼을 겨누는 아수라장.
그 지옥도 속에서 무공은, 다시금 가장 저열한 폭력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던 중, 낙양의 한 객잔에서 또다시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
이유는 허망할 정도로 사소했다.
2/18 꿈에서 본 내용 미개방
"왜 저쪽 탁자의 동파육이 내 것보다 더 큰가?"
고작 고기 한 점의 크기 때문에 고수들이 살기를 뿜고, 객잔 기둥이 잘려 나갔다.
개전의 원인이 되었던 '국물 한 방울'의 교훈을 누군가 가까스로 외치지 않았다면, 오늘 낙양은 또다시 불바다가 되었을지 모른다.
모두가 멈칫하며 칼을 거두었지만,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우리는 보았다. 서로의 눈 속에 번들거리는 광기를.
언제든, 누구든, 무엇 때문에든 다시 서로를 죽일 수 있다는 그 끔찍한 가능성을.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그저 터지기 직전의 고름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것일 뿐.
이 불안한 침묵이 비명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결국, 강호의 정점들이 움직였다.
2/19 꿈에서 본 내용 미개방
정파의 무신(武神)들과 마교의 천마(天魔)들이 회합을 가졌다.
그들은 결단을 내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흉기가 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스스로의 이빨과 발톱을 뽑아버리기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그들이
가장 먼저 무공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이 지하 감옥을 찾아 봉인을 풀었을 때, 적은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너희는 절대 나를 죽이지 못해. 너희 힘의 근원이 바로 나니까'라고 비웃는 듯했다.
그 오만한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100인의 고수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동시에 백 개의 검이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아아악-!!"
그리고, 조용히 다가온 입문 도복의 무사가 놈의 목을 베었다.
2/20 꿈에서 본 내용 미개방
뚝.
비명은 멎었고, 대지를 진동시키던 거대한 기운은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단전이 텅 비어버리는 상실감.
평생을 쌓아온 공력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허무함.
그것은 평생 안 먹고 안 입으며 모은 전 재산을 하루아침에 불태워버린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곳곳에서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땅을 치며 통곡했고, 누군가는 멋대로 이 결단을 내린 천마와 무신들을 향해 피를 토하듯 저주를 퍼부었다.
위대한 희생? 천만에. 대다수의 무인들에게 그것은 그저 끔찍한 강탈이자 재앙이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무공(武功)이 사라졌다.
경공으로 하늘을 날던 이들은 이제 두 다리로 흙을 밟으며 걷는다.
내공으로 바위를 부수던 이들은 이제 괭이를 들고 밭을 간다.
천마였던 자, 무신이었던 자들은 한편으론 존경받지만, 동시에 지독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고수가 길 가던 왈패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원한을 품은 자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그들은 세상을 구한 영웅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노력을 앗아간 원수일 테니까.
기대했던 낙원은 오지 않았다.
무공이 사라진 빈자리를 금세 다른 것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약육강식의 도구만 칼에서 돈으로 바뀌었을 뿐,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더 이상 길을 걷다 눈먼 검기에 목이 날아갈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객잔에서 밥을 먹다 고수들의 기싸움에 휘말려 횡사할 일은 없어졌다는 것.
우리는 그저 살아간다.
비린내 나는 피바람 대신, 땀 냄새 나는 흙바람을 맞으며.
적어도 예전보다는 아주 조금 덜 불안하게.
헌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모든 게 잠잠해졌는데, 왜 가끔은 이 고요함이 견딜 수 없이 지루한 걸까.
마치 내가 아주 시끄럽고, 정신없고, 번쩍거리는 곳에 있었던 것처럼.
이 밍밍한 죽과 차(茶)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아주 자극적인 '허기'가 찾아왔다.
2/21 꿈에서 본 내용 미개방
무공을 잃으니, 잊고 있던 기억들이 틈을 비집고 올라온다.
'가가오배이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곳의 행사 같은 것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제는 그 정확한 단어조차 가물가물하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의 인생을 서서히 잊어가고 있나 보다.
귀갓길에 친우들과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술자리.
바삭하게 튀긴 닭요리에 시원한 보리술 한 잔.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맵싸한 불닭소면, 지글지글 익어가는 돈육(豚肉)에 소주 한 잔.
내 것인지도 불분명한 그 낯선 환상들이, 왜 이리도 사무치게 그리운 걸까.
만약 그 기억이 한낱 꿈이 아니라 정말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아주 만약에나.. 그게 내가 맞다면..
지금쯤 그곳의 '나'는 친구들과 와글와글하게 웃으며 떠들고 있을까?
아니면, 야근이라는 것에 시달리며 졸고 있을까.
무엇이든 좋다.
그저, 내일 죽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면.
혈겁(血劫)을 남기려 시작한 기록이었거늘.
피비린내 나던 기억은 점차 흐릿해지고, 도리어 그 환상 같은 일상만이 지독하게 선명해지는 밤이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붓을 내려놓으려는 이 순간.
왜 저 허공 너머에서 누군가가, 숨죽여 이 낡은 종이를 함께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을까.
2/22 꿈에서 본 내용 미개방
어쩌면... 내가 이곳에 온 게 맞는지도 이제는 헷갈린다.
어젯밤 꿈에는 내가 작은 네모난 판떼기를 들여다보며, 열심히 만화와 소설을 즐기고 있더라.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 했던가.
내가 네 꿈을 꾸는 것인지, 네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꿈속의 나는 정말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이제 예전 나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믿는다.
또 다른 내가, 내가 원래 살던 그 세상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음을.
{user}(이)여.
이름을 기억 못 해 미안하네.
지금은 생각나는 게 자네가 쓰던 이 별호(別號) 뿐이구만.
나는 숱한 고난을 이기고 드디어 이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되찾았네.
자네... 아니, 나라고 해야 할까.
이제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잘 모르겠구만.
같은 사람이었으나 이젠 달라져 버린 나여.
아니... 나의 가장 친한 벗이여.